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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지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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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지명
‘포천’이란 지명은 조선 태종 113년(1413)에 생겨난 이름입니다. 포천은 원래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일 때 고구려에서는 마홀군(馬忽郡)이라 불렀습니다. 신라 진흥왕 때는 견성군(堅城郡)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때 다시 청성(靑城)이라 불렀습니다. 고려초에 와서 포주(抱州)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다시 조선조에 포천(抱川)이라는 오늘의 땅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포천의 선사시대
포천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의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주로 한탄강·영평천·포천천 유역을 따라 분포하는데, 선사시대 사람들이 수량이 풍부하고 평야 및 구릉지가 교차하는 곳에 주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탄강 유역의 포천시 관인면 중리 문배뜰 유적·중리 늘거리 유적·중리 아랫심재 유적을 비롯하여 사정리 화적연 유적, 자일리 팔호 유적, 운천리 오호 유적 등은 임진강 유역의 전기 구석기와는 달리 후기 구석기 시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중리 늘거리 유적
영송리 선사유적
이밖에 포천천 유역의 포천시 신북면 금주리, 포천동 어룡리 유적, 영평천 유역의 영중면 양문리·성동리·신장리와 창수면 오가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습니다. 유물로는 여러 면 석기·긁개·찍개·밀개·주먹도끼 등이 출토되었으며, 중리 늘거리 유적에서는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를 포함하여 약 1만 2000점이 출토되어 연천 전곡리 유적과 비교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을 들 수 있습니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이 토기 조각들은 서해안 조개더미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여 서해안 빗살무늬 토기인들이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내륙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포천시 관인면 중리 유적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양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나왔습니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구(遺構)도 발견되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로는 고인돌, 청동 검, 간 돌도끼, 반달 칼, 민무늬 토기 등이 여러 곳에서 보고되었습니다. 고인돌은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자작동, 일동면 수입리·사직리·기산리, 가산면 금현리·방축리, 소흘읍 송우리, 신북면 만세교리 등지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들 고인돌은 개석식과 탁자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작은 개울을 끼고 있는 낮은 구릉 끝에 위치 한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포천시 군내면 포천일고등학교에서는 마제 돌도끼와 마제 돌살촉이 출토되었습니다.

철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포천시 관인면 중리 용수재울·영중면 영송리·포천 자작리 유적지 등에서 다수의 집 자리 유구와 함께 중도식 토기(中島式土器) 및 갈돌·갈판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입지 조건 등으로 보아 초기 국가의 중요한 구성단위인 읍락의 행태로 보입니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에서는 원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유구는 주거지 5기와 토기군 1개소가 발견되었습니다. 유적에서 출토된 긴 항아리형의 민무늬 토기들은 한강 유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포천 지역이 한강 유역의 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 됩니다.
포천의 삼국시대
지금의 연천, 포천 지역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되는 313~314년 무렵, 이전 어느 시기엔가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의 북쪽 변경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지역은 소멸한 한 군현에 대신하여 고구려 세력이 백제와 대치하는 접전 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포천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성을 개축한 포천 고모리 산성(抱川古毛里山城)·성동리 산성(城東里山城)·고소성(姑蘇城)·대전리 산성(大田里山城) 등 옛 성터가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고모리 산성 이정표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임진강과 한강 유역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을 빼앗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미사성은 포천 관내에 있었던 대전리 산성의 백제 때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고모리 산성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장수왕[재위 413~491]의 한성 함락 이후 마홀군(馬忽郡)·내을매현(內乙買縣)·양골현(梁骨顯) 등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습니다.

6세기 초반 안원왕[재위 531~545]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극심한 정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의 동맹군에 의해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겼습니다. 이때 마홀군은 신라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포천의 남북국 시대
757년(경덕왕 16) 한산주[신주의 후신] 마홀군에서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으로 바뀌고, 내을매현과 양골현 또한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陰縣)으로 각각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예성강 이북 북방 경영이 진행되면서 한주의 북쪽 끝인 철원과 함께 발해에 대한 전진 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하대에 들어 왕실 내의 빈번한 왕위 쟁탈전과 자연재해로 정치 체제가 와해되고 농촌 사회의 해체가 가속화되면서 농민 봉기와 함께 지방에 호족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때 견성군은 궁예(弓裔)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양길(梁吉)의 부하이던 궁예는 그를 몰아내고 901년 왕위에 올라 송악에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905년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습니다.

포천 지역에는 당시 궁예가 왕건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는 전승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궁예의 패전과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전승 내용으로 볼 때, 견성군은 친(親)궁예적인 지역이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포천의 고려시대
포천 지역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포주와 동음현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940년(태조 23)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견성군을 포주(抱州)로 고쳤다고 하는데, 이때 내을매현은 폐지하였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종 초 전국을 5도[서해도·교주도·경상도·전라도·양광도] 양계[북계·동계]와 경기로 나눌 때, 포주는 북계에 속해 있었고, 995년(성종 14) 다시 10도제로 개편하면서 포주에 단련사가 파견되었습니다. 1018년(현종 9)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눌 때 양광도(楊廣道) 양주군(楊州郡)에 속하였고, 1069년(문종 23) 경기를 종전의 13개 군현에서 50여 군현으로 확장할 때 양광도에서 경기로 편입되었습니다.

1172년(명종 2) 양주군에서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포주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공양왕 때 포주는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법(科田法) 시행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고려 말 이색(李穡)이 세속을 떠나 왕방산(王方山)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한 이야기가 전하며, 실제 성여완(成汝完)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왕방산 아래 계류촌[현 포천시 신북면]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왕방 거사(王方居士)라 하였습니다.

1173년(명종 3) 포주에 향교가 설치되어 지역민들을 교육하였고, 궁예의 영향을 받아 고려 초에 미륵불이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내원사[백운산]가 도선(道詵)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절터 유적을 통해 볼 때 고려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포천의 조선시대
1393년(태조 2) 영흥현이 영평현으로 개칭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포주가 포천현으로 개칭되면서 각각 현감이 파견되었습니다. 이때 포천의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광해군 때 포천현과 영평현이 합쳐져 영흥도호부로 승격되었고 경기 감영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1623년 다시 포천현과 영평현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조선 초 포천현은 왕실과 밀착된 지역이었습니다. 태조·태종·세종 등 왕실의 사냥터와 군사 훈련장으로 이용되었고, 포천현 재벽동(滓甓洞)에는 신의 왕후[조선 태조의 비]의 농장이 있었고, 철현(鐵峴)에는 신덕 왕후[조선 태조의 제2비]의 농장이 있었습니다. 한편 영평현에도 개국 공신인 여진인 퉁두란[청해 이씨(靑海李氏) 시조 이지란(李之蘭)]을 모신 청해사(淸海祠)가 있음을 볼 때, 고려 시대의 포주·동음현보다 왕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호국과 충절의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양치(楊治)는 세종조에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북방 개척에 무용을 떨쳐 함길도 절도사를 지냈고, 김종서가 세상을 뜨자 포천의 천주산(天柱山) 아래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는 포천의 소흘산(所屹山)에 거주하였습니다.

포천 지역은 한양과 근접하였고, 수려한 경관을 가지고 있어 왕자와 사족(士族)들의 은거지로 이용되었고, 이들의 무덤 또한 많이 남아 있습니다. 태종의 외손인 이즙(李楫), 선조의 12남인 인흥군(仁興君),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 대군(麟坪大君), 철종의 아버지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등의 무덤이 있고, 이 밖에 박순·이덕형·이항복·조경 등 사족의 무덤이 있습니다. 금강산 유람 길에 오른 관리와 선비들은 포천현 안기역에 머물렀고, 영평현은 수려한 영평팔경이 있어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찾았던 곳입니다.
인평대군묘 및 신도비
조선 후기에 포천 지역은 근기(近畿) 지역을 대표하는 상업 도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구도 증가하여 포천현의 경우, 1454~1842년경의 변화를 보면 400여 년 만에 2,300여 가구가 늘었고, 인구는 1만 2000여 명이 증가하였다.

또한 금강산을 지나 함경도와 북방으로 가는 관북대로[경흥대로]상에 위치하여 물산의 유통이 빈번하여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 있는 송우점과 송우장은 조선 후기 경기 북부의 대표적인 점막 시장[점포 상점]으로 동북 방면과 도성을 연결해 주는 상업 요충지였습니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